개식용 잔혹사 마지막 말복, 양순이에게 사과와 위로를 건넵니다.
커다란 머리와 단단한 몸, 조금은 투박하지만 천진하고 순박한 얼굴.
양순이는 도사 혼종입니다.
아기처럼 맑은 눈의 양순이는 사람을 많이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다가가면 긴장하고,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못합니다.
양순이가 살아온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 두려움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 유럽에도 양순이처럼 크고 힘센 개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개의 힘과 충성심을 필요로 했고, 이들에게 짐과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전쟁이 나자 기관총과 탄약을 실은 수레까지 끌었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만나 마음 아파했던 『플란다스의 개』의 파트라슈도 그렇게 혹사당하던 사역견이었습니다.
네로의 할아버지에게 구조된 뒤에는 가난한 가족의 우유 수레를 함께 끌었습니다.
하지만 네로에게 파트라슈는 수레를 끄는 개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었습니다.
화가를 꿈꾸던 네로가 루벤스의 그림을 동경할 때에도 파트라슈는 곁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네로가 평생 보고 싶었던 루벤스의 그림을 찾아 생의 마지막 밤 성당에 갔을 때에도, 곁에는 파트라슈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의 꿈을 함께 바라보고,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던 동물.
개는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파트라슈를 사랑했고, 그 이야기를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크고 힘세고 순한 개들에게 또 다른 멍에를 지웠습니다.
개를 먹기 위해 대규모로 번식시키고 사육하는 ‘개농장’을 산업화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습니다.
한국의 개식용 산업에서는 일본에서 들어온 도사계 대형견과 우리 땅에서 오랫동안 사람 곁에 살아온 누렁이 같은 개들을 교배해 더 큰 개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개농장주들에게 왜 도사계 개를 키우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여러 번 비슷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덩치는 큰데 착해서 관리하기 쉽다.”
큰 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 순하고 쉽게 공격하지 않는 성품마저 대규모로 개를 사육하기에 편리한 특성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믿고 따르는 개의 성품조차 인간은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서 마당을 지키고, 아이들과 뛰놀며 한 가족의 삶을 함께했던 토종 누렁이에게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다른 개보다 낮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수많은 개에게 우리는 이름 대신 하나의 용도를 붙였습니다.
‘식용견’.
어떤 개는 가족이고, 어떤 개는 먹어도 되는 존재라는 구분.
양순이도 그 잔혹한 역사 속에서 태어난 개입니다.
양순이는 큰 외상의 후유증으로 뒷다리를 제대로 펴지 못합니다.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심한 상처로 다리부터 복부까지 피부가 유착되어 당겨지면서 다리를 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한 상처였던지 지금도 피가 나 치료받고 있습니다.
아직 사람을 두려워하는 양순이에게 우리는 사람을 믿으라고 재촉하지 않으려 합니다.
긴 시간 사과와 위로를 건네며, 먼저 우리가 믿을 만한 존재가 되어주려 합니다.
개식용 종식은 한 가지 음식을 먹지 않게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인간 곁에서 살아온 개와 우리의 관계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린 날 사랑했던 개가 있으신가요?
혹은 사랑했지만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개가 아직 마음 한편에 남아 있으신가요?
그 아이에게 미처 건네지 못했던 마음을 오늘 양순이에게 조금 나누어 주시고 결연으로 양순이의 사람이 되어 주세요.
📌 양순이와 결연하기
https://ekara.org/kams/alliance/1810
미안해, 양순아.
많이 힘들었지.
너의 큰 몸도,
굽은 다리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모두 우리가 천천히 기다릴게.
너는 처음부터
‘먹는 개’가 아니었어.
그저 한 마리의 개였어.
이제 누구에게도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돼.
사람을 빨리 믿지 않아도 돼.
아픈 몸을 치료하고,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을 때 쉬면서,
그저 양순이의 삶을 살아가면 돼.
개식용을 끝낸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개에게 저지른 오랜 배신을 끝내고,
다시 개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일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