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 동물권 더배움 2022] 길고양이를 주제로 한 집중강좌 갈무리

  • 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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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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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배움 집중강좌는 과학, 인문학, 에코페미니즘 등 기존의 사상과 개념들을 동물권과 연결 지음으로 동물권에 대한 관점을 넓히고 입체적으로 다뤄보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최근 길고양이를 향한 갈등과 혐오, 폭력과 살해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만큼 올해 더배움 집중강좌는 <길고양이>라는 주제 방향성을 갖고 6월의 매주 화요일 저녁 총 4회차로 구성되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부터 길고양이와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까지 함께했던 2022년 더배움 집중강좌 후기와 참가자들의 소감을 통해 참여하지 못했던 분들도 길고양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실 수 있길 바랍니다.


1강. 우리 시대의 생명과 폭력 (6/7) 우희종(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더배움 첫회는 "우리 시대의 생명과 폭력"이라는 제목으로 우희종 님께서 진행해주셨습니다.

이번 코로나 팬대믹을 비롯하여 새로 나타나는 전염병의 75%가 인수공통전염병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업 발전과 인구 증가로 인해 사람이 사용하는 공간이 늘어남에 따라, 야생 동물의 살 곳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즉 서식지 파괴와 종간 접촉이 증가하는 현상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공장식 사육 및 유전 다양성 소실을 초래하는 대량 소비 문화로 인한 지구 착취와 생태 위기 또한 현재 진행형인 것을 원인으로 뽑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탈인간중심주의는 시대적 요청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탈인간중심주의를 논하기 위해 근원적인 생명 자체의 역사성부터 짚어봅니다. 우리 모두는 150억 년이라는 우주의 시간과 관계를 담고 있는 존재로 상호의존성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 현상은 각각의 요리 재료들이 모여서 하나의 새로운 음식이 되듯 예측불가능성의 창발적 관계로부터 발생하며, 여기에는 수많은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수반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기고 다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고 다시금 또 다른 변화가 생기기를 반복합니다. 이렇게 개인이 집단이 되고 사회를 이루며 생물학적 관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까지 관계망을 형성하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코로나 사태를 비롯한 각종 신종 전염병들 또한 그동안 우리가 형성해온 과거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점과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과거를 짚어봤다면 미래는 대해서도 사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희종 님은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신종 전염병을 발생시키는 근대의 인류세 & 신자유주의를 넘어,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포스트휴먼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비대면을 통해 포스트휴먼의 시작을 말하는, 현장성과 맞춤형이라는 4차산업의 방향을 제시하며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재정립 합니다. 동시에 인간과 동물을 명확하고 영구적으로 구별하는 경계 설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에 따라 동물권, 동물이야말로 포스트휴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도나 해러웨이는 '모든 종류의 종들은 세상의 주체와 객체 만들기의 얽힘의 결과이다'라고 하며 동물을 경멸이나 연민의 대상 혹은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온 존재로서 대하는 '반려종'이라는 개념을 철학의 무대로 불러낸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폭력'이란 무엇일까요? 우희종 님은 폭력은 바람직한 관계의 단절과 왜곡이고, 비폭력이란 관계의 회복이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폭력은 강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약자도 체념이나 무관심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 억압적 상황에서의 침묵 또한 폭력에 동참하는 것으로, 억압적 상황임에도 관계 회복을 위한 적극적 삶의 자세 자체가 비폭력이자 생명 존중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코로나팬대믹 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의 현실과 국제 전쟁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종 차별과 성차별 등 폭력은 차별과 관계가 깊습니다. 이제는 인간 중심의 종차별주의를 넘어 긍정적 포스트휴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생태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같으며, 이것은 우리 안의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는 자세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희종 님은 '생태계 역사는 생존과 삶의 역사이자, 고통 극복의 과정'이라며 생태계와 생명의 연결망-관계성이 단절되고 왜곡되는 것이 곧 폭력이라는 메세지와 함께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생명 존중이란 ‘당당하고 아름답게 사는 삶’에 대한 존중이고 이는 바로 우리의 비폭력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거듭 명심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더 이상 다른 생물종을 인간이 지배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공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포스트 휴먼'으로서의 앞날을 진정으로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느냐죽느냐 문제가 아니라 당당하고 아름답게 사는 삶에 대한 존중이 생명존중,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시대적 흐름으로 우리가 종차별주의와 싸우고 동물권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어 좋았어요."


2강. 가벽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6/14) 김화용(미술작가/기획자)

더배움 2회차는 "가벽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동물권 감수성 시각으로 문화예술 다시 보기"라는 제목으로 김화용 님께서 진행해주셨습니다.

강연은 "가벽?"이라는 짧은 질문으로 시작됐습니다. 가벽은 임시로 만들어진 벽을 의미합니다. 커다란 전시장에 작품을 배치하고 동선을 만들기 위해 임시로 세우는 벽이지요. 일반적으로는 흰 페인트를 칠하고, 작품명이나 전시 소개 등을 pvc로 된 시트지를 사용해 그 위에 붙입니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2~3개월 전시가 진행된 후, 가벽들은 모두 폐기됩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재활용도 불가한 폐기물이 다량 발생합니다.

'제로의 예술'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신 김화용 님은 예술과 지구 환경 및 동물권의 관계를 질문합니다. 심지어 환경 문제에 관한 전시마저도 흰 가벽을 세우고 폐기물을 발생시키는 현실을 목도하며, '예술에서 비거니즘이나 지속가능성은 담론으로만 존재하는가'라는 고민을 가지게 되셨다고 합니다. 페인트칠만 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가벽을 재활용할 수 있는데,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예술계의 관행이나 그것에 담긴 예술(혹은 작가, 미술관)의 권위가 '지속가능한 예술'을 어렵게 합니다. 최소한의 폐기물만 남기는 친환경적인 전시에 대한 논의와 대안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화용 님은 '쓰레기' 문제 외에, 살아 있는 '생명체'를 예술의 재료로 사용하거나 생명체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지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 의식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가령 백남준의 <TV물고기>라는 작품은 환하게 켜진 TV 화면 앞에 수조를 설치해 살아 있는 물살이를 전시하고, 이강소의 <Untitled 75031>이라는 작품은 살아 있는 닭을 작품의 일부로 전시합니다.

원래는 허용되었던 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의문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생명과 소수자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다시 재현되는 일은 우리 사회에 언제나 있어온 발전입니다. 이를 동물과 예술에 적용한다면, 과거에 동물을 활용했던 작품을 이 시대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옳은지, 혹은 현 시대에 걸맞게 재구성하면서도 작품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지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원작의 오리지널티와 새로운 시대의 진보된 기준, 이 중 무엇을 더 중요시하는가에 따라 다른 선택이 이뤄질 것입니다.

비거니즘 예술은 미술 작품의 주재료나 미디어 아트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비판적 물음을 던집니다. 가령 동물의 털로 만든 붓, 동물의 뼈가 쓰인 물감, 돼지나 토끼 젤라틴으로 만든 아교 등을 사용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혹은 거리 외벽에 거대한 크기의 미디어 아트를 설치했을 때, 관객에게는 작품의 가치나 의미보다 스펙터클만이 잔상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작품의 메시지보다는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의 방법론적 화려함만이 남을 때, 예술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거대한 재현과 스펙터클 안에 담긴 메시지가 우리의 일상 감각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혹자는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 혹은 '창작의 자유' 등을 말하며, 동물/생명/환경 문제를 다 따지려면 예술가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타자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는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무제한으로 창작하거나 아무것도 창작하지 않거나'라는 이분법에 빠지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예술 방법론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김화용 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 당연하게 여겨져 온 것을 탈학습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예술을 고민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술을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감상'에 '다시 읽기'를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작품 그 자체만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생산되고 향유되어온 맥락을 읽어냄으로써 우리는 작품과 더 복잡하고 두터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모든 작품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 저마다의 사회문화적 위치에 있으니까요.

김화용 님에 따르면 "생태적 감수성, 동물권 감수성을 살리는 예술은 자연적인 것을 다루거나 파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많은 존재들의 생애주기 전체를 보여주는 것, 지워졌던 관계망의 부분을 가시화하는 것, 서로를 연결하고 순환 감각을 회복하게 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동물과 지구 환경을 비롯해 사회적 소수자들과의 단절을 극복하고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감'을 회복하는 것, 이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이를 우리의 일상 감각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동물과 지구의 편에 선 우리에게 새로운 예술이 되어줄 것입니다.

"동물권과 연결된 환경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셔서 너무 좋았습니다. 플라스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컸는데 플라스틱의 입장에 관한 말씀으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산의 문제에만 집중해선 안되겠다는 게 인상 깊었어요."

"스스로 발언할 수 없는 생태계와 동물의 권리에 대해 인간의 언어로 말할 때 충분히 숙고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

"고양이 문제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생각하며 더배움 강의를 신청해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과 관점들을 생각해볼 수 있었고 예술 문제에서 다루는 강연은 처음이라 새로웠습니다."


3강. 도시 속 길고양이는 무엇을 돌보는가? (6/21) 전의령(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더배움 3회차는 "도시 속 길고양이는 무엇을 돌보는가?"라는 제목으로 전의령 님께서 진행해주셨습니다.

1999년 9월 16일자 경향신문에는 "야생고양이 '공포'"라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게재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길고양이'나 '동네고양이'가 아닌, '야생고양이' 혹은 '도둑고양이'로 불렸지요. 인간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길고양이들에게는 '침략자' 이미지가 주어졌습니다. "서울 도심 주택가 소름 끼치는 무법자", "밤마다 7~8마리 떼지어 활개", "주민피해 확산 '외출하기 겁난다'" 등등의 기사 내용에서 당시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혐오적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2022년인 현재, 위와 같은 내용의 기사가 발행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이제 우리는 길고양이가 사람을 먼저 공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동네에서 우리와 함께 공존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전의령 님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반려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돌봄'의 관계로 재규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길고양이 또한 '도둑고양이'가 아닌 새로운 이름을 얻고 돌봄 및 공존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지요. TNR이라는 제도적 돌봄이 안착되었고, 고양이들을 돌보는 케어테이커도 과거에 비해 현저히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문화 현상이나 제도뿐 아니라, 학술 및 관념의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의령 님은 20세기 후반 이후로 발전하기 시작한 '탈-인간중심주의적인' 사상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인간중심성을 벗어난 사상들은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동물 또한 나름의 '행위자(actor)'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동물들의 '행위력(agency)'에 주목합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길고양이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고양이들은 어떤 행위력을 발휘하고 있을까요?

데이비드 하비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는 잉여생산, 잉여자본, 잉여노동이 발생하는 장소이자 과잉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효율적 생산과 이윤 추구를 우선시하는 자본주의는 '공유재'를 사유화 및 탈취하며 다수 민중의 소외를 심화시키는데, 이러한 소외와 양극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바로 '도시'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도시는 끊임없는 개발과 발전의 대상이며, 서울만 보더라도 일상적인 재건축과 재개발이 서울을 "하루살이 도시"(발레리 줄레조, 2007)로 만들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대로인, 과거의 향수를 간직한 장소라는 것은 이제 서울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시 환경의 변화는 도시의 또 다른 일원인 비인간동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령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길고양이의 시선으로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 현장을 보여줍니다. 같은 공간이라 해도 인간과 동물은, 그리고 개별 동물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간성을 경험하기에, 해당 영화는 길고양이들이 경험하는 아파트 재개발 현장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둔촌주공아파트를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고양이들은 둔촌동이나 재개발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을 불러오고, 그들이 관계 맺게 하며, 서로 협업하여 무언가를 이뤄내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폐허가 된 현장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상기 시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마 답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너머에 있는 무언가, 가령 생명일 수도 '다른' 관계나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전의령 님의 강의는 "도시 속 길고양이는 무엇을 돌보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이 질문에 대한 열린 답변으로 끝을 맺습니다. 인간이 일방적으로 돌보는 '대상'으로서의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행위력을 행사하며 자본주의와 도시 개발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행위자'로서의 고양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