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 '세계 동물의 날' 새벽
2019년 10월 4일 새벽 3시. 카라 활동가들은 수개월 전 구조한 미니피그 3마리의 임시보호처가 있던 파주로 향했습니다.
그날은 동물보호의 의미를 되새기는 '세계 동물의 날'로서 타이밍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극명히 대조되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ASF 발병으로 수많은 사육 돼지들이 '예방적' 미명 하에 죽임당하고 있었으며, 특히 강화에서는 유례없이 행정구역 내 모든 돼지가 일제히 살처분된 터였습니다.
고무줄처럼 제멋대로인 근거 없는 살처분 명령의 칼끝이 카라가 보호 중이었던 미니피그에게까지 향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 졸이던 나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새벽, 반려돼지로서 임시보호처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릴리', '로즈', '자스민'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활동가들은 '이제 가야할 때'라며 이들을 깨웠고, 이동을 위해 한 마리 한 마리를 어르고 달래어 포획틀에 넣었습니다.
▲ 예방적 살처분을 피해 급히 이동한 미니피그들
미니피그들의 거취를 옮기는 임무는 무사히 완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살처분에 '협조'해 달라는 전화를 받다
10월 3일 오전 카라 활동가는 파주시로부터 황당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카라에서 보호 중인 미니피그들 살처분 집행에 행정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파주시는 살처분 '명령'이 아니라 '협조 요청'이라 하였고, 살처분의 근거를 따져 물으니, 당시 통화에서 파주시는 설정된 방역대, 그리고 최근 ASF 발병농가와 미니피그 임시보호처 간 거리를 묻는 활동가의 질문에 우물쭈물 대답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방역대조차 설정하지 않은 채 살처분 '협조 요청' 연락을 했던 것입니다. 몇 시간 뒤 다시 연결된 통화에서 최근 발병농가와 임시보호처 간 직선 거리는 약 6km인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방역대 확인조차 없이 미니피그에 대해 살처분 '협조 요청'을 한답시고 카라에 연락한 파주시는 '이런 돼지들 때문에 ASF가 퍼지게 됐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마치 미니피그 살처분이 당연한 것처럼 합리화하려 했습니다.
카라는 합당한 근거도 없이 반려돼지들을 무조건 살처분할 수는 없다며 파주시에 미니피그들에 대한 ASF 검사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주시는 ASF 검사를 거절하며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검사 못 해줍니다. 검사해서 ASF 음성 나오면 그때는 (미니피그들) 살처분 안 하려고요?"
>>무조건적 살처분은 우리의 선택지가 될 수 없어
ASF 음성이 나올까 봐 검사를 해줄 수 없다고 하는 파주시와 더 이상의 대화는 어려웠습니다. 파주시는 무조건적인 살처분만을 원했고, 이러한 현실에서 위험도 평가나 역학조사, 과학적 방역 등은 사치스러운 수사에 불과했습니다.
논리의 상실과 탁상행정 살처분의 남발이 축산 동물에게 마구잡이로 확장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누군가의 소중한 반려동물에게까지 강압적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다는 섬뜩함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카라는 근거도 없는 살처분 협조 요청에 응하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원래의 장소에서 더이상 임시보호가 어려워진 미니피그들을 새벽 시간대를 이용하여 인근의 위탁처로 옮겼습니다.
▲ 인근 위탁처로 미니피그를 피신시키는 모습
활동가들이 반려돼지를 이동시킨 뒤 간발의 차로 같은 날 중앙정부는 파주와 김포 관내 모든 돼지를 수매 또는 살처분한다고 밝혔습니다. 강화처럼 행정구역 내 모든 돼지를 '일단 죽이겠다'는 결정으로 과학적 대응을 완전히 포기한 처사였습니다. 새벽에 미니피그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살처분이 이뤄졌겠구나 하는 생각에 활동가들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파주시, '두고 보자'며 카라를 고발하다
미니피그를 이동시킨 당일에도 대치는 계속됐습니다. 파주시는 쫓아가서 살처분할 기세로 카라에 미니피그를 어디로 옮겼는지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거취를 알면 미니피그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파주시는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주시는 입을 다무는 카라에 '두고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파주 경찰서는 카라의 담당 활동가 집에 예고 없이 들이닥쳐 미니피그가 어디 있는지 캐내려 했습니다. 활동가는 많이 놀랐지만, 차분히 대응했습니다. 야심한 시각에 영장 없이 자택을 찾아가 심문을 유도한 경찰관의 태도를 지적하자 경찰은 집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파주시는 '이동제한 명령을 어겼다'라고 주장하며 파주경찰서에 카라를 형사고발했습니다. 미니피그를 살처분해달라는 파주시의 '협조 요청'에 응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3인의 카라 활동가들은 파주시에 의해 고발 조치되었고, 가축전염병예방법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 카라 활동가가 받은 경찰 출석요구서
카라와 파주의 임시보호처 모두 ASF 발병 이후 이동제한명령을 받은바 자체가 없었습니다. 받지도 않은 명령을 어겼다고 하니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던 파주시의 악의적인 언론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파주시의 고발 건은 1월 29일 '혐의없음'으로 종결되었습니다.
>>ASF 검사 결과는 '음성'
10월 5일 경찰 수사로 미니피그의 위탁처가 발각(?)되었습니다. 카라 활동가들은 '릴리', '로즈', '자스민'이 있는 위탁소 현장을 지키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였습니다.
생석회가 위탁소 주변에 도포됐고 미니피그를 이동시킨 차량과 포획틀 등이 소독 조치 되었습니다. ASF 검사도 그제서야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채혈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릴리', '로즈', '자스민'에게 미안하고 힘든 과정이긴 했지만, 검사는 카라가 처음부터 원했던 바였습니다. 투명한 검사 결과야말로 무고한 반려돼지들이 살처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으니까요.
이튿날,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음성' 이었습니다!
'릴리', '로즈', '자스민'의 안위가 판가름 나는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네, 카라가 보호하는 미니피그 3마리는 죽지 않고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반려돼지 미니피그' 이야기
반려돼지에 대한 마음 아픈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근거 없는 살처분의 남발 속에서 카라는 미니피그를 힘겹게 지켰지만 그러지 못한 반려 미니피그도 있었습니다.
관내 모든 돼지 살처분이 있었던 강화에는 9마리 반려돼지들이 살고 있었고 이 미니피그들은 검사 한번 없이 모두 살처분되고 말았습니다.
카라의 활동가들은 10월 4일 오후 강화도 서쪽 끝단의 섬인 석모도로 달려갔습니다. 8마리는 이미 살처분되고 말았지만, 보호자가 살처분할 수 없다며 저항하고 있는 마지막 1마리 반려돼지를 함께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카라는 살처분을 막기 위해 살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준비해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강화로 향하던 내내 어떠한 소독조도 만나지 못했지만, 마지막 반려돼지가 아직 살아있는 작은 섬자락 끝에 있던 집, 그곳은 강화에서 만난 중 최고로 삼엄한 생석회가 도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곳이 ASF 바이러스의 근원이나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생석회로 도포된 미니피그 ‘겨울이’의 집 앞
카라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강화의 마지막 반려돼지의 보호자는 그간 홀로 어렵게 미니피그를 지켜오다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 마지막 반려돼지의 보호자 역시 카라가 그러했듯 강화군에 검사라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강화군은 살처분에 응하지 않으면 행정대집행으로 살처분을 한 뒤 그 비용까지 청구하겠다는 강압적 태도로 보호자의 집안 전체를 압박했습니다. 며칠을 버텨오던 보호자는 마침내 어쩔 수 없이 백기를 들었고 결정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카라를 만나는 것조차 힘겨워했던 보호자의 태도로 미뤄볼 때 얼마나 깊은 스트레스와 상심을 겪었을지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가련한 강화의 마지막 미니피그의 모습 또한 가슴 저렸습니다.
해저물녘 만난 미니피그 '겨울이'는 자신을 위해 반려인이 만들어 준 별도의 집안 자신의 침실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겨울이'에겐 삶의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살처분 남발의 칼바람 속에서
살처분이 방역의 일환은 될 수 있지만 방역의 전부가 아닙니다. 오래도록 카라가 '과학적 방역'과 '위험도 평가'를 외쳐왔던 이유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탁상행정 살처분, 기계적 살처분을 '방역'이라 할 수 없고 살처분의 남발을 '방역의 강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탁상행정 살처분을 남발하면서 이것을 강화된 방역이라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ASF 감염경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경기 북부의 모든 사육돼지들을 싹쓸이 살처분으로 죽이고 난 뒤에도 ASF 바이러스는 2021년 5월 현재 멧돼지로부터 계속 검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ASF 대응에서는 참으로 많은 문제점이 확인되고 드러났습니다.
바이러스가 행정구역과 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방역대 설정을 한참 넘어서서 유례없이 관내 모든 돼지를 살처분하는 지자체들이 나타났습니다. 방역상 목적과 상반되게 오히려 바이러스 전파 위험을 높이는 방식의 광란의 멧돼지 사냥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반려 미니피그에 대한 검사는 거부하면서도 논리적·과학적 근거조차 없이 무조건 죽이라는 강압적 반려돼지 살처분까지 강행되었습니다.
방역상 필요불가결한 살처분을 과학적 방역의 전제하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지금과 같은 근거 없는 살처분 폭력의 확대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갈 길이 멀지만 동물권행동 카라는 뿌리 깊은 탁상행정 살처분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싸워나갈 것을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