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0일, 아침 일찍 한 통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락을 한 사람은 동물권행동 카라가 운영하는 공원급식소의 자원봉사자. 사진 한 장을 보내며 ‘공원에 흰색 여우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자원봉사자가 보낸 사진
여우가 나타났다는 공원은 서울 도심에 있는 공원입니다. 공원은 크고 작은 도로로 사방이 막혀 있고, 그 도로를 건너면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들어서 있는 곳입니다. 야생동물이 나타날 일도 없는 위치인데 발견된 동물이 ‘여우’라니요. (우리나라 토종 여우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복원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합니다) 믿기지 않아 사진을 다시 봐도 분명 약간의 은빛이 도는 새하얀 털을 가진 여우였습니다.
최근 몇 년간 ‘이색애완동물’이라며 다른 나라에서 사는 야생동물을 수입해 반려화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이색애완동물’ 북극여우는 마치 물건처럼 고가에 거래되는데, 공원에 나타난 흰 여우는 그런 식으로 고가에 수입되어 사람 손에 길러지다 유기된 것 같았습니다. 동물권행동 카라는 일단 구조를 결정했습니다. 누군가 단순한 호기심에 데려가거나, 데려가 다시 고가에 판매하는 일만큼은 없게 하고 싶었습니다. 발견된 곳에서 벗어나 아파트 단지나 상가로 옮길까 서둘러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공원에서 만난 북극여우는 편안한 듯 볕이 잘 드는 곳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이 나자 잠깐 눈을 떴다가도 이내 눈꺼풀이 무거운지 졸기 시작했습니다. 한쪽에서는 포획틀을 설치하고 활동가들이 근처에 왔다 갔다 하는데도 전혀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었고,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포획틀 안에 냄새가 많이 나는 캔을 잔뜩 넣고 낙엽으로 위장해 설치해두자 10분도 안 되어 다가와 포획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발판을 밟자 뒷문이 닫혔고, 여우는 놀란 듯 폴짝 뛰어올랐습니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였습니다. 어찌나 배가 고팠는지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도 미끼로 놓아둔 캔을 먹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후로도 한참을 포획틀 안에서 캔을 먹었고, 낙엽 사이사이 놓아둔 미끼까지 다 찾아 먹고서야 포획틀에서 나갈 궁리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북극여우에게 ‘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곧장 병원으로 이동했습니다. 검진 결과 약간의 탈수 증상과 어깨 이상 외에 건강 상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닉은 사람을 빤히 관찰하기도 하고 사람이 이마를 만져도 가만있습니다. 손가락을 보고는 노는 시늉도 합니다. 심지어 털에 변이 묻어 목욕까지 했습니다.
유기된 것이 너무도 확실한데 지자체에서는 닉을 야생동물이라고, 유기동물 공고 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키우다 버린 것이 분명함에도 유기동물이 아니고 야생동물이라고 합니다. 지자체의 설명대로라면, 닉은 마땅히 야생동물로서 보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닉은 유기된 외래종이라 우리나라의 야생동물이 구조되어 보호되는 야생동물구조센터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유기동물이면서 야생동물이고, 유기동물이 아니면서 야생동물도 아닌 닉. 이미 야생성을 잃어 다른 북극여우들과 함께 지낼 수도 없습니다. 지금 닉은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야생동물을 카페에 무분별 전시하고, 심지어 반려화하기 어려운 야생동물을 가정 사육하는 기형적인 문화가 하나의 유행처럼 우리사회에 번졌습니다. 제대로 된 관리체계 없는 야생동물 카페가 우후죽순 생기고, 어린 개체를 상품으로 올린 가정 분양 광고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현실이 되었죠. 이로 인해 북극여우를 비롯한 많은 야생동물들이 어렵지 않게 우리나라로 수입됩니다. 최근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서 상업적 거래가 불가능한 부속서 1급 앵무가 가정 분양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색애완동물’의 인기가 치솟고 야생동물을 팔고 사는 행태가 벌어지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감당하기 힘든 동물습성과 사육환경으로 결국 동물들을 포기하고 유기하기에 이릅니다. 카페에서, 가정집에서 길러지는 많은 야생동물. 언제 어떤 상황이 닥쳐 갈 곳이 없어질지 모르는데, 언제까지 모른 척, 누구나 돈만 있으면 키울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 할까요? 닉과 같은 처지에 놓인 동물들이 얼마나 더 있어야 야생동물이 반려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동물원 및 수족관으로 등록되지 않은 시설에서 야생동물 전시를 금지하는 법안(이용득 의원 발의), 야생동물 중 환경부령으로 정하는 종의 판매를 금지하는 야생동물법 개정안(한정애 의원 발의), 제한된 경우에만 허가를 받아 야생동물을 판매하고 인터넷과 택배 거래를 규제하는 야생동물법 개정안(이정미 의원 발의) 등이 발의되었지만 국회에 계류되어 있습니다. 발목이 묶여 버린 이 법안들은 속히 통과되어야 하며, 나아가서 여전히 사각지대에 속한 ‘야생동물의 반려동물화’ 문제를 공론화하여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닉’과 같은 야생동물들이 거리를 배회하지 않도록 규제를 두어야 합니다.
야생동물의 집은 자연입니다. 소유하고, 안아보고, 만져보고, 먹이를 주는 것보다 본래 살아가야 할 자리에서 살아가야 함이 마땅합니다. 고유의 습성을 지키며 사는 동물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사진으로, 책으로, 그림으로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 비인간동물과 인간동물이 오래토록 지구에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며 사랑입니다.
카라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닉에게 가장 이상적인 집을 찾아주려 알아보고 있습니다. 쉽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영영 찾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사회가 닉을 통해서 야생동물이 살아가야 할 곳은 카페도, 사람의 집도 아닌 ‘자연’임을 다시 한 번 인지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