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종교, 동물을 말하다 1탄 (2)

  • 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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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1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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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992
(1편에서 이어집니다)

조현철 신부님(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동물에 대한 가톨릭 이야기

“가톨릭 교리서에 따르면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적, 도구적 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실험도 합당한 한계를 지킨다면 도덕적으로 용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모두 들어가 있는 하나의 오이코스(Oikos, 공동체)에서 사는 구성원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존중, 관심, 배려를 얘기한다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학위과정은 원래 생태신학이었습니다. 구제역 당시 카라와 녹색당이 헌법소원을 하는 것을 보고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에서 개고기를 애용한다는 것은 선입견입니다. 신부님 중에 일부 개고기를 좋아하는 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 연유를 살펴보면, 예전에 먹을 게 없던 시절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교구 신학교의 뒷마당에서 개를 키워서 잡아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 이 분들이 습관이 되고, 나와서도 개고기 먹는 문화가 있어서 유지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을 대접한다고 하면 개고기를 대접하는 문화가 남아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수녀회에서는 먹지 않습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한국 일부 가톨릭의 일시적 전통으로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종교도 살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르침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그것은 종교도 문화의 침투를 그대로 받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리 중에 동물에 대한 가르침이 별로 없습니다. 가르침의 구속력도 다 다릅니다. 대부분 원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방대해서 다 살펴볼 수는 없고, 교리입문서에 해당하는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동물에 관한 것이 들어있는 장은, 2장. 7절 등인데, 제목을 보면 가톨릭의 동물에 대한 입장이 매우 복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7절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자연계 전체에 대한 존중입니다. 2장은 동물을 네 이웃으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7절 일곱째 계명은 소유의 측면에서 동물을 바라봅니다. 다른 곳에서는 자연이라는 큰 틀, 창조세계 안에서 다룹니다.

2415항에서는,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서 입니다. 인간중심적인 시각을 볼 수 있지요. 2416항에서는 동물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미하는 존재로 동물의 존재 의의를 말하면서도, 바로 뒤의 2417항에서는 인간에게 동물을 관리하도록 맡기셨으므로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정당하고, 동물실험도 합당한 한계를 지킨다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합당한 한계가 어딘가는 논란이 생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정말 인간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제약회사의 돈을 위해서인가? 이런 점에서 (이런 표현은) 도덕적으로 대단히 허약한 부분입니다. 분명한 것은 동물에 대한 도구적 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2418항, 동물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는 것은 문제라고 하면서도 인간에게 쏟아야 할 애정을 동물에 쏟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나온 존재인데 굉장히 독특한 존재입니다. ‘다스리’라는 권한 또는 과제를 주는데, 하나님의 의도를 반영하여 다스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도가 무엇일까요? 창세기에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는 구절이 후렴처럼 나옵니다. 보기만 해도 참 좋은 것을 어떻게 다스렸으면 좋겠다고 의도하시겠어요? 잘 보살피라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해석이 안 되어서 문제가 되는 현실이긴 합니다.

동물의 권리에 대해서는 앤드류 린지만이 아니고 성서를 통해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안식일 전통을 보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분명히 있습니다. 가장이 안식일을 지켜야지 가축도 쉴 수 있다고 나옵니다. 생태운동을 하는 수호성인으로 잘 알려진 성 프란치스코도 가톨릭의 전통 안에서 행했던 것이지 외부에서 끌어온 것은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면, 저는 순환의 원리, 자연의 원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원리를 따르면 식물은 탄소를 먹고 산소를 배출하고, 동물은 산소를 먹고 탄소를 배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피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식을 순환의 원리에 포함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물학대입니다. 오늘날 고기조달 방식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학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시스템이 무서운데, 학생들과 회식할 때 제일 싼 게 고기입니다. 학생들끼리 가기에도 고기집이 제일 쌉니다. 그 뒤에 공장식 축산이 있지요. 시스템화 되어 있어서 거기서 혼자 빠져나오라는 건 어렵습니다. 채식? 저도 좋습니다. 근데 장소도 찾기 힘들고, 돈도 많이 듭니다. 이런 문제가 현실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완전히 동일하진 않아도 부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존중, 관심, 배려를 얘기한다면 똑같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동물학대자가 과연 인간을 존중할까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제 표현으로 말하자면 생태적 세계관을 강조하는 건데요,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모두 들어가 있는 하나의 오이코스(Oikos, 집안. 창조공동체)에서 사는 구성원입니다. 사람들에게 일률적 기준을 주는 것보다 각자에게 생각의 원리를 주는 겁니다. ‘우리는 오이코스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생태적 세계관, 생태적 감수성을 갖고 주위를 바라볼 수 있다면 관계 설정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지 않을까합니다.


최서연 교무님(원불교 외국인센터장)
    -동물에 대한 원불교의 가르침

“원불교 계문 중, ‘연고없이(까닭없이) 생명을 죽이지 말며’가 있습니다. 연고의 경우에도 악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운차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멋있다’는 생각 대신 ‘맛있겠다’고 생각하는 탐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평소 동물에 대한 제 생각이 아니라 특별히 원불교에서 동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어서 이번에 벼락공부를 좀 했습니다. 원불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귀하기 때문에 동물도 함부로 죽이거나 괴롭혀서는 안 되며 인간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되므로 늘 감사하고 보은해야 할 존재로 여깁니다.

부처님 말씀에 ‘처처불상’, 즉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동물에 대한 태도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봅니다. 원불교 경전에 동물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은: 우리가 존재하는데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을 은혜라 하며, 4가지 사은(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을 밝히고 있는데, 동포에 초목금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문: 원불교 계문 중, ‘연고없이(까닭없이) 생명을 죽이지 말며’가 있습니다. 그럼 바이러스는 어떻게 하냐고 꼬투리 잡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 삶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살생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들 말합니다. 연고의 경우에는 정당방위, 중병이어서 약용으로 쓸 경우, 생업, 농사할 때 해충구제 등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것도 악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운차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멋있다’는 생각 대신 ‘맛있겠다’고 생각하는 탐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솔성요론에는 모든 사물을 대할 때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탐심 없이 청정한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저는 오늘의 토론회가 식품업에 관계된 대기업을 대상으로 ‘대기업, 동물을 말하다’ 이런 토론회였으면 더 좋았겠습니다. 고기가 제일 싸듯이 자본주의에서 전도된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같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생명존중 사상을 불어넣고, 고기가 아니라 채식을 어디서든 싸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돈이 된다면 안 하는 게 없는 세상이잖아요. 채식 식품사업을 하면 세상을 이롭게 하면서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설득하면 어떨까요.

동물을 잔혹하게 대하고 있는 현실을 많은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닭이 치킨이 되기까지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면 아이들에게 울림이 큰 것같습니다. 육식을 많이 하지 않았던 식습관 패턴으로 돌려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you are what you eat’처럼 정신과 육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먹는 것이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주니까 육식을 줄이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봅니다. 육식을 무분별하게 많이 하다보니 사람에게도 잔인한 일이 생깁니다. 호르몬제, 항생제 남용, 전염병 발생하면 대량 살육 등 인간사회가 염려됩니다.

계율에 따라서 연고 없이 개를 먹는 것은 안 됩니다. 출가자들은 ‘연고’를 떼어내고 개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개를 위한 천도제, 49제, 구제역 때는 동물 천도제도 재냈습니다. 동물은 동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대 종법사이신 정산종사의 법문에 따르면, 살생을 하여 약을 만들지 말라, 어항의 물고기, 꽃병의 꽃들도 자연 속에 살도록 하자고 하셨습니다.

종교는 사실 힘이 없습니다. 지금은 자본이 힘이 있죠. 소수, 비주류 분들이 이런 노력을 하시는데, 자라는 세대가 자본에 경도되지 않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종교의 역할은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보다 종교에 귀의했어도 실제 삶은 가르침과 다른 분들이 생태적 감수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일 것같습니다.


전진경 (카라 상임이사)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의 틀을 종교가 앞장서서 깨 주길...

"우리는 동물학대 하는 사람을 쉽게 타자화(대상화) 합니다. 엽기적인 동물학대가 일어나는 경우 누구나 잘못을 지적하고, 사회에서 제어 가능합니다. 종교쪽에서 해야 할 역할은 우리 몸에 체화된 (그래서 잘 인식하지 못하는) 동물학대에 주목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비주류 맞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자, 비주류가 모여서 속이 뻥 뚫리는 얘기를 들으니 행복합니다. 뇌가 호강하고 있습니다.

사실 종교의 이름으로 비참한 폭력이 행해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면서 늘 두 가지 생각을 해왔습니다. 하나는, 왜 (사랑을 말하는)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되는가? 다른 하나는, 종교의 힘이 굉장히 크다는 겁니다. 사랑을 설파하는 종교에서 수 백만명을 살생하도록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물학대와 관련해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활동을 하는 동물단체에 있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동물학대를 어떻게 보는가. 좀 명확히 말하면, 모든 종교는 ‘생명’을 말하는데, 왜 (생명존중에 대한) 인식이 느리고 뒤쳐져있는가? 이런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들어보니, 원래 종교는 그렇지 않지만, 인간중심적, 편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해 왔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종교 본연의 자세와 가르침을 따른다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오늘의 키워드는 동물학대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데, 우리는 동물학대 하는 사람을 쉽게 타자화(대상화) 합니다. 하지만 엽기적인 동물학대가 일어나는 경우 누구나 잘못을 지적하고, 사회에서 제어 가능합니다. 오히려 종교쪽에서 해야 할 역할은 우리 몸에 체화된 (그래서 잘 인식하지 못하는) 동물학대에 주목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분법적 사고로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고착화시켜서 동물학대를 정당화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 사고의 틀을 종교가 강력히 지탱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소극적인 자세, 논의조차 안 되는 주제, 비주류인 상태를 반성하고 되돌린다면 빠른 시간 안에 개선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도 가담하고 있는 동물학대에 강력한 제어가 가능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과 동물을 키워드로 분산된 문제인식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자리는 카라가 열심히 제공하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주세요.

불교쪽에 한 가지 섭섭한 부분을 말씀드리면, 생명존중을 말씀하시는데 보호나 존중의 개념을 너무 방사상으로 확대하다보니, 그럼 식물은 그럼 돌은, 그럼 물은... 결국은 아무 것도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구조적인 동물학대의 현실은 너무 실존적이고, 너무 거대하고, 피부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도 생명이다’를 논하기 전에 비명 지르는 개를 구하는 게 먼저라고 보고, 그것이 가장 실천력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교리를 넘어서는 실천에 대해서 논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원불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오늘 말씀하신 걸 보고 굉장히 합리적이고 구체적이라서 놀랐습니다. 사회 여러 곳에서 자기중심적 해석, 언어편견, 무지가 많습니다. 종교가 이런 쪽에서 역할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임순례 (카라 대표)
    -성직자들께서 교회에서, 절에서, 성당에서 동물보호를 더 적극적으로 말씀해주시길...

"동물을 너무 배려,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동물도 똑같이 천국에 갈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잃어버린 권리,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주는 방식으로 운동의 방향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카라는 인식의 변화를 통해 동물운동을 해왔습니다. 종교는 누군가의 인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인데 이러한 자리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원불교 교무님께서 종교는 힘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교당에 가면 가장 순수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봅니다. 흡수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때 좋은 말씀을 하시면 많은 분들이 수긍하실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신지, 왜 법론에서 스님들은 고기 먹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하지 않으시는지 의아했습니다. 한 때는 스님들이 뒤로는 좀 드셔서 그런가(웃음) 오해도 했습니다. 요즘은 남에게 강권하지 않는 한국 선불교의 전통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원래 한국 사람들은 동물에 대해 무한 사랑을 주던 사람들인데 왜 최근에 동물학대가 심한 사회가 되었을까 고민해 봤는데, 저는 급속한 산업화로 가장 약자인 동물에게 그 피해가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장윤재 교수님 말씀 들어보니, 기독교 문화도 일조를 했군요.

동물을 너무 배려,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동물도 똑같이 천국에 갈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잃어버린 권리,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주는 방식으로 운동의 방향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중 질의응답

질문도 답변도 한 주제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아서 발언 내용을 모두 정리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로 제기된 질문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생태영성을 깨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왜 종교에서 보다 강하게 설교, 법론, 강론하지 않는가?
- 어쩌다 한번 얘기하다 마는 토론회가 아니라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하려면?
- 각 종단이 하나씩이라도 구체적 실천지침을 가질 수 있었으면...
- 개신교는 교회연합회의 이름으로 동물희생제를 금지시킬 수 없는지?
- 천주교 내부에서 개식용의 자성을 어떻게 하면 이끌 수 있는지?
- 불교 복지관에서 복날 이웃주민들에게 삼계탕 대신 사찰음식을 대접할 수는 없는지?
- 나는 채식인인데, 반려견에게 육식을 줘야 하는가?

더 깊고, 더 대중적인 ‘종교, 동물을 말하다’ 2탄도 기대해주세요~
늦은 시간까지 참여해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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